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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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2.01 조회수 : 1379 | |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신선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했습니다.” 스물다섯 청년이 프로야구 정규시즌 최우수 선수 트로피를 치켜들며 포효하는 대신 침착하게 전한 수상소감의 한 구절이다. 넥센 히어로 서건창 선수가 그이다. 홀로 된 어머니에게 강한 아들의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더욱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꿈의 구장에 우뚝 선 그는 작은 거인이었다. 오랜만에 젊은 기상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청년에게 박수를 보낸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삶을 살라고 강요하며, 개인의 노력을 정당한 대가로 평가해주는 관용의 폭은 협소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사회의 생태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해서 내가 나로서 살아 남아야 하는 고비 마다 천길만길 낭떠러지 위에 자신을 다그쳐 세워야 한다. 이제까지 꿈은 이루어진다의 신념으로 걸어온 호시우행(虎視牛行)의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지금까지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보이지도 않는 적들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할 일은 아니다. 미지(未知)의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의 모험이나 사회의 냉대에 대한 복수의 심정은 더욱 아니다. 스스로 인정하기에는 불편하지만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때는 늠름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더 이상 길이 없어 보이는 낭떠러지에서 두려움을 떨치고 이제까지의 걸음 그대로 한 걸음 더 내딛는 용기가 그것이다. 열정(passion)은 문자 그대로 괴로움과 외로움을 극복해야 하는 고난을 수반한다.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했다. 내가 선택한 길은 걸어가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 프로야구가 시작할 무렵 우연히 인사동 골목에서 구입한 액자가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글씨였다. 서울의 봄이라는 역사의 진공 같은 시절도 하수상했고, 안개의 깊이만큼 앞길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모든 상황이 강퍅한 출판사 초창기였다. 유명 서예가의 작품도 아니고, 익히 알던 글귀도 아닌 조그마한 액자에 끌려 부지불식간에 지갑을 열었다. 운명은 우연히 방향을 잡기도 하는 모양이다. 제대하기 전 최전방 방책선 참호에서 세월을 낚으면서 나무판에 새겨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주먹을 불끈 쥐었던 충무공의 ‘尙有十二’는 태고의 음향 속에 묻고, 이 글귀를 새롭게 가슴에 품었다. 아직도 내게는 열두 척의 배라도 남아 있다는 자긍심마저도 백척간두에 세우고 그 걸음 그대로 한 발짝을 더 내딛기로 했다.
조그마한 사무실 벽에 이 글귀를 걸어 놓고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고 볼멘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때마다 이 글대로 벼랑 끝에서 또 한 걸음을 수없이 내디뎠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 것 같은 일도 다반사였다. 그때마다 떨쳐 일어나 더 멀리 또 한 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굴러떨어진 바윗덩어리를 산 정상으로 다시 올려야 하는 일을 영원히 되풀이해야 하는 천형(天刑)을 받은 신화 속의 시지프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단순 반복의 도로(徒勞)였지만 그 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이라는 믿음의 탑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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